나는 커피를 잘 모른다. 성인이 되어서도 꽤 오랫동안 커피 대신 탄산음료나 솔의 눈(!)을 마셨고, 카페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에는 달달한 라떼 정도만 마셨을 뿐 이른바 '어른의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정도 전 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돌체 라떼가 인생 최고의 커피라고 생각했던 그야말로 어린이였다. '어른의 커피'를 마시게 된 이후에도 커피 자체에 그렇게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원두가 어떻고 로스팅이 어떻고 크레마가 어떻고 약배전 강배전이 어떻고 이런 거 하나도 모르고 그냥 마셨을 때 쓴 맛이 나는 커피보다는 신 맛, 산미가 있는 커피를 더 좋아한다는 정도의 취향만 알 뿐이다. 아내는 예전 이태리 여행에서 현지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셔보았었고, 그때 이미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아내가 고른 이 곳, 앳 디 엔드 에스프레소 바에서 마신 이태리식 에스프레소 커피는 그야말로 "진짜 어른의 커피" 그 자체였고 나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화성 행궁 근처에는 정말 수많은 카페가 있는데 대부분 메뉴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이 곳은 확실히 결이 다르다. 에스프레소만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메뉴판에는 내가 생전 처음 보는 메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사장님이 우렁찬 목소리로 아주 친절하게 안내해주신다. 메뉴에 대해 잘 모르겠다면 부담 갖지 말고 사장님께 물어보자. 메뉴판 옆에는 주문을 받는 태블릿이 있는데 이 태블릿으로 실제 메뉴 사진을 직접 보여주시기도 하는 등 에스프레소 바가 생소할 수 있는 손님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한 고민을 많이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처음 주문한 메뉴는 샤케라또와 카페 후르또 그라니따. 둘 다 훌륭했다. 샤케라또는 이태리식 냉커피(?) 느낌이었다. 에스프레소와 얼음을 쉐이커로 돌려서 시원하고 부드럽게 마실 수 있게 하는 커피라는데 거품이 꺼지기 전에 빨리 마셔야 한다는 사장님 조언에 따라 사진을 후딱 찍고 한 모금 마시는데 목젖을 때리는 그 향이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향이었다. 아 이게 진짜 커피구나! 여름에 참 잘 어울리겠다 싶었다. 후르또 그라니따는 에스프레소 위에 라임 소르베를 얹어서 나왔는데 이것도 참 맛있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기 힘들 정도로 둘 다 훌륭했다. 두 잔만 홀짝 마시고 가기에는 조금 아쉬워서 메뉴를 좀 더 시켰다. 이태리에서는 그냥 밖에 서서 주문해서 나오면 호로록 마시고 가는 문화라고 하던데 여기는 한국이니까. 다음에 주문한 메뉴는 카페 아르소, 카페 그라니따, 그리고 디저트 쪽도 하나 먹어보자 해서 앳 플러리 를 주문했다. 완전 커피 파티! 카페 아르소는 뜨끈한 커피가 담긴 크렘 브륄레 느낌이었는데 이건 나에겐 좀 부담스러웠다. 커피를 덮은 설탕층을 먼저 먹어버리고 나니 그 밑에 커피가 너무 썼다. 이것이 어른의 커피 맛인가... 앳 플러리는 젤라또에 칠리 초콜릿을 섞어 나오는 메뉴였는데 이런 건 어디서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맥도날드 맥플러리 느낌이지만 젤라또가 쫀득한 진또배기 젤라또에다가 매운 맛이 나는 초콜릿이 섞여서 오묘한 맛이 났다. 처음 몇 스푼은 참 맛있었는데 뒤로 갈수록 좀 부담스럽긴 했다. 전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와 힙하면서도 고즈넉한 인테리어, 뱅 앤 올룹슨 스피커를 타고 퍼지는 잔잔한 음악과 카운터 테이블 모서리에 가득 쌓여있는 에스프레소 잔들. 안에 자리가 많지는 않은데 정형화 되어 있지 않고 여러 형태로 앉을 수 있게 배치되어 있어서 공간이 그 자체로 지루하지 않았다. 참 마음에 드는 곳이다. 안에 콘센트가 없으니 카공족들도 없고 정말 조용하게 커피와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메뉴 가격은 2천원에서 4천원 대까지 있는데, 단순히 나오는 커피의 양을 생각하면 가격이 비싸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유니크한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값이라고 생각하면 합리적이라고 느껴지는 가격대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을 때, 좀 더 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고 싶어질 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생각에 잠기고 싶어질 때 종종 들르게 될 것 같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앳디엔드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900번길 3 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