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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박사

별로에요

1년

#청진옥이야기 #1. 때는 바야흐로 2005년. 은사께서는 갑자기 ‘너 아침 먹었니?’ 하시더니 같이 학교 앞에서 종로 가는 버스 잡아타고 나를 피맛골 뒷길 청진옥으로 데려가셨다. 오전 10시 반 무렵으로 기억한다. 홀에는 밤새 노동을 하신 듯한 분들이 소주 반주에 해장국을 드시고 계셨고 난롯가에 자리잡은 교수님과 나는 청진옥 해장국에 내포 한 접시로 해장(?)을 시연했다. 이후 청진옥은 내 단골이 되었고 나는 ‘명동교자보다 맛있는 음식이 있다니!’ 하고 놀랬으며 한예종 연기과 형, 누나들하고 새벽 2시에 석관동 울랄라에서 쌈짓돈 추렴해 택시타고 달려가 해장국 한 그릇에 소주 몇 병씩 들이붓곤 했다. #2. 피맛골이 죄다 밀리고 르메이에르 1층으로 청진옥이 이전했다. 청진옥 사장님은 꿋꿋이 카운터를 지키셨고 가끔 사람 없던 시간대에 가면 넋두리처럼 답답한 진상 손님들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곤 했다. ‘이봐요 삼촌, 내가 이 해장국을 왜 펄펄 안 끓이는 줄 알아요? 이 온도에 먹어야 젤루 맛있거든? 근데 술 먹고 와서 큰소리로 진상을 피워. 돈 받고 다 식어빠진 해장국 내 놓는다고…’ 할 때 사장님 그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3. 오늘, 오랜만에 청진옥에 들렀다. 2005년부터 틈만 나면 들렀어도 줄 한번 선 적 없었는데 웨이팅이 있더라. 코로나를 겪은 청진옥은 365일 24/24에서 월요일 휴무. 밤 21:30 종료로 바뀌어있었다. 웨이팅 손님 접객도 마뜩찮았는데 안내한 자리로 앉았더니 ‘아 거기는 4인석이라 다른 자리로 가라’고 하는데 안내받은 데로 했을 뿐이라고 했는데도 또박또박 따지고 들더라. 못 비키겠다고 했다. 모듬전을 주문했는데 손을 내저으며 안된다고 하더니 5분 후에 모듬전을 내 가는 모습이 내 눈에 걸렸다. ‘저거 뭐에요’ 했더니 외려 당당하다는 듯이 ‘아, 이제부터 안된다고요’ 라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변명을 내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니나다를까 국물은 미원과 마늘 맛으로 가득했고 신선하던 파는 서로덕지덕지 엉켜있었다. 도저히 내가 알던 그 추억의 노포가 아니었다. #4.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에은 동료 시인 이문재 시인이 ‘지금 빨리 청진옥으로 와라’고 했단 시가 실려있다. 미안한데 저 모양의 청진옥이라면 술 사준다 불러도 싫다. 맛도 접객도 뭐도 다 수준 이하, 내가 알던 그 곳이 아니었다. 박준 시인의 시가 떠올랐고 내게 청진옥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나도 안 아쉬웠다. 다시는 청진옥에 가지 않을 듯 하다. 정말 슬픈 건,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슬프지 않다는 게 더 슬프다.

청진옥

서울 종로구 종로3길 32 부경빌딩 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