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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떼가 대학생이었을 때, 그러니까 당근마켓같은 너무나 편리한 동네 중고거래 플랫폼이 없었을 때, 내가 거의 유일하게 이용했던 커뮤니티는 '연세대학교 벼룩시장' 페이스북 페이지였다. 물론 중고나라의 존재를 몰랐던 건 아니지만서도 중고로운 평화나라의 명성이 너무나 자자했던 덕에 감히 가입을 시도조차 하지 아니하고 뭘 팔 일이 있으면 무조건 '연벼룩'에 글을 올렸다. 2. 연벼룩에 내가 처음으로 올린 글은 '핸드폰 케이스' 판매였다. 당시 내 취미는 내 귀엽고 소중한 아이폰6S를 더 귀엽고 소중하게 만들어줄 핸드폰 케이스를 찾는 것이었다. 한창 유행했던 디팍스의 동물 캐릭터 골덴 케이스는 물론이요 이름없는 브랜드가 만든 다양한 패턴과 소재의 케이스를 마음에 들 때마다 수집하다 보니 핸드폰을 바꾸려할 때쯤 이것들의 처분이 곤란해졌고 연벼룩에 사진 수십장을 올리며 금쪽같던 내 새끼들을 분양했다. 사진을 하나하나 찍고 일일이 넘버링을 매겼을 때 케이스의 숫자가 대충 20번을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3. 이렇듯 핸드폰 케이스에 상당히 진심이었던 사람이 언젠가 직장인이 되었고 나의 직업은 외부 사람들을 매우 빈번하게 만나'뵙'고 명함을 주고받아야 하는 업무를 포함했다. 수습 기간 3개월을 지나고 마침내 내 인생 첫 명함을 받았을 때 가슴이 뿌듯해질만큼 벅차올랐던 감정...같은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덤벙대기 일쑤였던 천성 탓에 어딜 나갈 때 명함 두 장을 챙기는 습관을 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때마다 선배들에게 타박을 얻었던 탓이다. 몇 번 혼이 난 뒤로 나는 미팅을 나갈 때 필수적으로 챙기는 나의 일상적인 모든 것들에 명함을 넣어놓았다. 지갑, 안경 케이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핸드폰에까지. 4. 핸드폰을 사면 서비스로 끼워주고는 하는 투명한 젤리 케이스. 몰개성의 아이콘이라며 핸드폰 케이스 처돌이었던 대학생 때에는 받자마자 버렸던 케이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 내 아이폰은 바로 그 케이스를 입게 되었다. 핸드폰과 케이스 사이에는 항상 빳빳한 명함 두 장은 꼭 채워놓은 채.명함이 떨어지면 바로바로 채워넣어야 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도록 케이스는 꼭 투명해야 했다. 5. 내 이름, 핸드폰 번호, 이메일 주소, 직장 명과 부서가 또박또박 인쇄된 명함은 꼭 속옷같은 느낌. 그리고 이를 감싸주는 젤리 케이스는 이를 전혀 가려주지 못하는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옷. 어딜 가든 항상 나를 드러내지만 핸드폰 케이스에 진심이었던 나의 취향은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이 케이스를 끼고 2년 남짓한 회사 생활을 보낸 끝에 나는 퇴사했다. 6. 집회사집회사집회사주말에는그래도쉬어야지그리고다시집회사집회사집회사...의 생활을 반복하면서 사실 내가 핸드폰 케이스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회사 물건들을 정리할 때, 아 이제 이 명함도 빼내야지라고 생각하며 케이스를 벗겨내자 명함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사과 마크가 드러났다. 케이스를 수집했을 때에는 한달에 서른마흔다섯번은 마주쳤던 아이폰의 사과 마크. 거기에 있었는지도 까먹었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투명 케이스 안에 명함을 쑤셔넣었구나. 7. 그날 나는 매번 '비즈니스 캐주얼' 키워드를 찾았던 지그재그 검색란에 '핸드폰 케이스'를 앱 다운로드 이후 처음으로 입력했다. 핸드폰 케이스의 세계는 라떼 이후로 많은 것들이 바뀌어서 당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았고 애초에 지그재그에서 찾는게 맞는 건가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핸드폰의 새 옷은 급하게 찾지 않기로 했다. 머지 않아 숨어있던 핸드폰 케이스 취향이 다시 불타겠지.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아이폰 뒷통수에 계속 붙어있었던 사과 마크처럼.

투명 젤리 케이스

메이커 없음

OEO

필력에 취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