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된 팬시한 초밥집 이 짧은 한 문장을 입에 올리는 순간부터, 이미 절반의 평은 끝나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화”와 “팬시함”이라니. 듣기만 해도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얼굴을 찌푸리겠지요. 과연 그것들이 부정적인가? 네,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다만 세상일이 늘 그렇듯, 어떤 말이 부정적이라는 사실이 곧바로 어떤 맛이 “나쁘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집이 기본 대기 30분, 길면 1시간까지도 가는 이유는 저로서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 데에는, 최소한 그만한 사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한국화 란 무엇일까요. 샤리는 초대리의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밥은 약간 질척한 쪽에 가깝고요. 네타는 숙성이 “만족스럽다”고 말하기엔 어딘가 망설여집니다. 그렇다고 활어회처럼 생생하게 튀지는 않지만,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한국형 일식집 정도의 숙성 선에서 멈춥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질은 샤리와 약간 쫀득하고 탄탄한 네타가 서로를 “끌어올리는” 조합이 되지 못합니다. 두 존재가 각자의 사정을 안고 한 상에 앉았지만, 대화가 자꾸 엇갈리는 그런 느낌. 하지만—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팬시함 이란 무엇일까요. 초밥이 올라간 쟁반이 제법 큽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한가운데로 초밥을 밀집시켜 배치해 두었습니다. 이 방식은 사실 맛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눈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요. 이렇게 찍으면 사진이 잘 나옵니다. 특히 아웃포커싱을 한껏 넣어 찍으면 그럴듯하게, 아니 꽤 근사하게 보입니다. 마치 그릇이 아니라 장면을 내어주는 것처럼요. 그런데, 문제는 늘 “그럴듯함”의 뒤편에서 조용히 고개를 듭니다. 훈연향이 초밥치곤 꽤 강한 피스가 두어 점 있고, 등푸른 초밥이 하얀살 초밥과 바짝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훈연향이든 등푸른 생선의 기운이든, 아무리 처리를 잘 했다 해도 담백한 초밥 쪽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 역시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한 쟁반에 담아내는 연출’이 우선이라면, 이런 배치는 거의 운명처럼 따라오는 대가이니까요. 가성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갈릴 겁니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은 저렴하지는 않다. 음식이 엉망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다만, 결국 이 결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저와는 잘 안 맞는 것—아마도 그 정도겠지요. 어떤 가게는 확실히 잘하고도, 어떤 사람에게는 끝내 “다음은 없다”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불화(不和)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취향이라는 것이 살아남으니까요.
스시 지현
서울 마포구 동교로 227-7 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