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삼거리식당 #아롱사태수육 * 한줄평 : 동양그룹 창업주의 단골 식당 1.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은 세 가지 흰 가루였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밀가루, 설탕, 시멘트.. 원조 밀가루가 제분소를 돌리고, 설탕이 배급처럼 풀리고, 폐허 위로 시멘트 포대가 쌓여갔다. 세 가지는 거의 동시에 화폐가 되었고, 그 물결을 탄 이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첫 세대를 이루었다. 2. 동양 오리온그룹의 창업주, [서남 이양구] 회장(1916~1989)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함경도 출신의 실향민이었던 그는 밀가루와 설탕으로 먼저 기반을 만들었고, 훗날 초코파이로 기억되는 오리온 제과를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가루 산업의 마지막 한 축, 시멘트를 향해 그는 삼척으로 내려왔다. 바로 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의 전신)의 시작이었다. 3. 그가 삼척에 올 때마다 찾았다는 집이 새천년도로 15번지, [삼거리식당]이다. 이 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간판과 메뉴판을 함께 보면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간판에는 50년, 메뉴판에는 60년..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동시에 이미 지나버린 숫자라는 점에서, 이 식당의 시간을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오히려 더 정확하다. 4. 전해오는 이야기 가운데 유독 시선을 붙잡는 대목이 하나 있다. 이양구 회장이 이 집 냉면을 먹을 때 설탕을 뿌렸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함흥냉면집 테이블 위에 설탕 단지 하나쯤 놓여 있는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지만, 설탕이 귀하던 당시로서는 냉면에 설탕을 뿌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추모집 발간위원회에서 내놓은 [동양보다 큰 사람]이라는 책에서는 그가 냉면에 설탕을 뿌려 먹은 거의 최초의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적고 있다. 5. 물론 그 사실의 정확성을 따지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설탕을 만든 사람이, 그 설탕을 냉면 위에 가장 먼저 얹어 먹었을 것이라는 이 장면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감각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6. 미식가이자 대삭가였던 그는 이 집에서 냉면을 늘 두 그릇 비웠다고 한다. 한 그릇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허기가 있었을 것이다. 실향의 음식인 함흥냉면 앞에서 실향민이었던 그는 배고픔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갰다. 7. 이 집의 주 메뉴는 차돌박이와 살치살, 치마살을 돌판에 올리는 한우 특수부위 모듬이다. 고기가 익는 동안 판에는 기름이 스며들고, 식사의 끝에는 그 기름 밴 판 위에 사골 육수와 강원도 막장을 더해 된장찌개를 끓여낸다.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단단하게 완결되는 구성이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을 다시 찾게 만드는 것은 아롱사태 수육 쪽에 더 가깝다. 소 뒷다리 사태 가운데에서도 가장 깊은 자리에 붙어 있는 아롱사태는 힘줄과 결합조직이 근섬유 사이를 촘촘하게 파고든 구조를 가지고 있어, 지방이 아니라 콜라겐으로 식감을 만든다. 오래 삶아내면 기름기 없이도 입안에서 촉촉하게 풀리는 감각이 생기는데, 그 미묘한 차이가 이 부위를 따로 기억하게 만든다. 9. 삼거리식당의 수육은 그것을 적당한 두께로 썰어 쌈채소 위에 얹어 낸다. 마늘과 막장이 각자의 방향에서 고기에 닿다가, 쌈으로 묶이는 순간 하나의 맛으로 정리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따로 보면 분명 다른데, 입 안에서는 하나의 문장처럼 이어진다. 10. 그리고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냉면이다. 메밀 비율이 높아 회갈색을 띠는 면은 질감이 다소 거칠고, 씹을수록 곡물의 향이 뒤늦게 올라온다. 기름진 고기 식사의 끝에 차고 담백한 냉면으로 마무리하는 이 흐름은, 특정한 레시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밥상 위에서 굳어온 순서에 가깝다. 이양구 회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의 앞에는, 설탕 단지가 하나 더 놓여 있었겠지만. 11. 삼척의 산은 석회암이다. 그 돌이 가루가 되어 도시를 세웠다는 사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곳에서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이 설명된다. 설탕을 만들던 사람이, 그 설탕을 냉면 위에 얹어 먹고, 결국 그 냉면을 두 그릇씩 비워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자리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 삼거리식당의 시간은 어쩌면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삼거리 식당
강원 삼척시 새천년도로 15 삼거리식당 1층
맛집개척자 @hjhrock
설탕을 뿌려먹는 이야기 재밌네요^^
권오찬 @moya95
@hjhrock 제가 십수년 전 동양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할 당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직접 뵙진 못 했지만, 참 걸출한 인물이었는데.. 동양그룹이 무너진지도 벌써 십년이 훌쩍 넘었네요. 세월이 무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