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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구
5.0
5개월

✍️ 피맛골 터줏대감 대학원생 나부랭이로서의 일정이 이리 빡빡할 줄 상상도 못했다. 일기 한 편조차 쓸 여유가 없다니! 사람에게 주어진 공부 총량이라는 게 있다면, 아무래도 학부 때 놀러다니느라 채우지 못했던 분량까지 지금 몰아서 채우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내향성 순도 92%에 빛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발표를 지극히 혐오한다. 학부 때는 전공 특성상 발표 수업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전공이 달라서인 건지, 아니면 대학원 과정이라서인 건지-! 겨우 한 수업에서만, 고작 두 번이었지만, 그마저도 내향쟁이에게는 시작 전 크나큰 용기와, 종료 후 한풀이에 가까운 폭식이 필요했다. 저녁 여덟 시, 내 폭식은 집 가는 방향이 엇비슷한 한 학기 선배와 함께였다. 한 번은 일년에 두 번은 가는 듯한 마제소바 맛집에서, 한 번은 이곳, 청진옥에서. 오래 전,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보다 더 이전에, 그러니까 수험생 시절이었다. 학원가 어느 해장국집에서 맞닥뜨렸던 색 바랜 분홍빛깔과의 첫만남이 썩 아름답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지”라는 것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더랬다. 그랬던 내가 그 옛날 이곳 문을 열어제꼈던 건, 그저 인스타그램 피드에 맛집 하나 더하기 위함이었달까. 수북이 담긴, 꼬들꼬들한 양을 다 먹고 나니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던 “그것”. 직관형이 찰나에 얼마나 많은 망상을 할 수 있는지, 그 한계치를 시험한 후, 수저를 입에 가져갔을 때 느꼈던 맛은 뜻밖이었다. 물론 이 메뉴를 내 마음대로 작명할 수 있다면 “선지 해장국”보다는 “양 해장국”이라 명명하고 싶다만은, 그 양의 꼬들꼬들한 식감으로 치솟은 기분이 선지로 인해 훼손되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학기, 생애 최초로 겪었던 빈혈이라는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던 것일까. 세 시간은 잤나 싶었던 나날이 지속되었던 기간 말미에 뜬금없이 이 음식이 떠올랐던 것은. 21시까지라는 표지판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몇 시간 전 발표하던 패기가 아직 죽지 않아 축객령을 무릅쓰고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그런 나를 맞이한 건 어서 오라는 사장님의 푸근한 얼굴이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특”일 수밖에 없는 그릇 하나와 그보다는 아기자기한 모양새의 그릇 하나가 나왔다. 둘 다 슴슴한 맛을 선호하는 편인지라, 옆에 비치되어 있는 양념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혹은 영업 시간이 끝난 후에도 끝없이 리필되었던 깍두기 덕분일지도-! 치솟는 물가와는 무관하다는 듯 여전히 수북한 양을 먹고 나면, 여전히 잡내 없는 선지가 한가득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00년 가까이 피맛골 터줏대감 자리를 잃지 않는 이유는 변함없이 담백한 맛과 푸짐한 양, 그리고 그 옛날 우리네의 정이 묻어나는 접객에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을 어느 날 밤이 소소한 낭만으로 추억될 듯하다.

청진옥

서울 종로구 종로3길 32 부경빌딩 1층

미오

글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

맛집개척자

대학원생활 만만치 않죠... 그 피곤한 일상 속에 힘이 되는 음식입니다...이 집 기가 막히죠...^^

탱구

@rumee 감사합니다😁

탱구

@hjhrock 부속물 잘 못 먹는 편인데 이곳은 맛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