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쁜지
4.0
1일

광주에서 대학 다니던 시절, 어느 미식 평론가가 쓴 ‘비오는 날의 명화원’이라는 글에 혹해서 이곳을 엄청 와보고 싶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비오는 날에 맞춰 가보려고 했는데, 원래 휴무가 많은 집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영 타이밍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0년쯤 지났는데 여전히 비오는 날의 명화원은 못 가봤네요. 그리고 2010년대 이후의 명화원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 무렵 방문했다가 꽤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전과 같은 맛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보다 당시에는 시대가 변했는데도 위생이나 접객이 전혀 따라오지 못한다는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테이블이 끈적거리고 혼자 가면 괜히 눈치를 보게 되는 분위기까지. 맛까지 기대에 못 미치니 굳이 다시 와야 하나 싶었죠. 그 뒤로 한 번인가 더 왔던 것 같은데 꽤 오랜만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어제오늘 비가 왔지만 하필 일·월요일은 휴무. 비오는 날의 명화원은 아니고 비오는 날 올려보는 명화원 정도가 됐습니다. 막상 가는 날 하늘을 보니 좀 과하게 맑더군요. 버스에서도 아마 QWER의 ‘내 이름 맑음’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ㅎㅎ 한시 반쯤 도착했는데 여전히 거의 들어차 있습니다. 그래도 마침 한 자리가 비어 바로 들어갑니다. 메뉴는 단출합니다. 탕수육, 짜장, 짬뽕, 만두. 그리고 예전과 비교하면 위생이나 접객은 확실히 많이 좋아졌습니다. 테이블이 끈적거리던 느낌도 없고 혼자 왔다고 눈치를 주는 분위기도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기억하던 2010년대 초반의 명화원과는 꽤 달라졌네요. 탕수육이 먼저 나옵니다. 찍먹파 분들이 미리 알아두셔야 할 것은 여기는 소스가 처음부터 부어져 나옵니다. 볶먹도 아니고 그냥 부먹입니다. 소스는 약간 묽은 편. 케첩 베이스이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강한 새콤달콤은 아닙니다. 적당히 올라오는 단맛에 새콤하다기보다는 약간의 신맛이 바닥을 잡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케첩 탕수육 소스 중에서는 단맛과 신맛, 감칠맛의 배합에 상당히 신경을 쓴 맛입니다. 예전에는 이 맛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명화원 소스의 조화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튀김은 찹쌀이 들어간 듯 바삭바삭하다기보다는 빵실하고 쫀득한 쪽입니다. 처음 몇 입은 바삭함도 느껴지지만 소스를 머금은 아래쪽 조각들은 금방 녹진해집니다. 그러다 문득 왜 옛날 평론가나 미식가 어르신들이 이 집을 두고 ‘비오는 날’을 이야기했는지 조금 납득이 갑니다. 비가 내려 차분해진 삼각지에서 약간 눅눅하고 달큰해진 탕수육을 집어 먹는 모습이 묘하게 잘 어울립니다. 요즘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바삭함으로 재단하면 단점일 수도 있는데, 이 탕수육은 조금 눅눅해졌을 때 오히려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구석이 있습니다. 술은 빼갈로 한잔하구요. 탕수육 먹을 때 양파나 당근 같은 채소 부산물을 잘 안 드시는 분들도 많은데 이 집에서는 같이 먹어보시길 권합니다. 채소와 묽은 소스가 꽤 잘 어우러집니다. 고기 수율이 아쉽다는 평도 꽤 있는데 이날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고기 없이 튀김만 남은 쪼가리들이 조금 있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소스를 잔뜩 먹어 녹진해진 튀김 쪼가리들을 마지막에 모아서 맥주 한잔하는 것도 꽤 좋아합니다. ㅎㅎ 탕수육을 몇 조각 먹고 있으면 짬뽕이 나옵니다. 사진에서는 붉은색이 과장돼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것보다는 얌전합니다. 칼칼하게 나오는 것은 맞지만 고추기름이 이빠이 들어간 요즘식 짬뽕은 아닙니다. 예전에 먹었던 짜장은 솔직히 ‘이건 좀…’ 싶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짬뽕을 주문했는데 짬뽕이 좋네요. 국물은 칼칼하지만 콜록거릴 정도로 맵지는 않습니다. 전날 소주 한두 병 마시고 아침에 해장하러 와서 “아따, 마침 좋다” 할 만한 정도의 시원함을 만들어 주는 맵기와 짠맛입니다. 채소들도 적당히 뭉글어져 단내가 납니다. 면은 크게 인상적이지 않지만 비교적 얇아서 후루룩 먹기 좋습니다. 20년 전에는 그렇게까지 와보고 싶었던 집이었고, 한동안은 크게 실망해서 관심을 접었던 집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먹어보니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조금씩 보입니다. 명화원이 갑자기 세련된 중식당이 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투박하고, 탕수육도 요즘 사람들이 기대하는 빠삭빠삭한 스타일과는 멀죠. 그런데 그 묽은 케첩 소스와 빵실한 튀김이 시간이 지나면서 녹진하게 붙어가는 맛은 확실히 이 집만의 것이긴 합니다. 다음에는 정말 비오는 날 한번 와봐야겠습니다.

명화원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202 1층

맛집개척자

저는 이집 오히려 만두가 괜찮더라고요.^^

쁜지

@hjhrock 만두 먹어봏 생각을 못했네요. 다음에 가면 만두 먹어봐야겠습니다.

미오

와... 명화원을 마음에 담아두게 되는 글이네요. 홀리듯 읽었습니다 하늘 한번 보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