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까지 가서 미역국을 먹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미역국이라면 생일날 먹는 음식, 산모가 먹는 음식, 혹은 집에서 흔히 끓여 먹는 국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런데 부산에서는 이 평범한 미역국이 제법 거창한 한 상으로 차려집니다. 그 배경에는 부산이라는 지역의 향토성이 있습니다. 부산 기장은 예부터 미역의 산지로 이름난 곳입니다. 여기에 바다에서 나는 가자미와 성게, 전복과 조개 등을 더해 미역국을 끓여 먹었습니...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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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찌개도, 된장찌개도 사 먹는데 왜 미역국은 집에서 끓여 먹었을까요? 우리에게 미역국은 조금 특별한 음식입니다. 아이를 낳은 산모를 위해 끓이고, 생일이면 어김없이 밥상에 올렸습니다. 누군가의 건강을 염려하고,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마음이 미역국 한 그릇에 담겨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미역국은 오랫동안 식당보다 집에서 끓여 먹는 음식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미역국을 전문으로 내는 식당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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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읽는 가장 정겨운 방법 중 하나는 당시의 시대상과 음식을 함께 톺아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올린 서울 도시의 팽창과 택시 산업의 부흥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본 〈기사식당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에 이어, 이번에는 1970~90년대 성업했던 서울의 오래된 기사식당과 그 메뉴를 통해 시대를 읽어봤습니다. 혼자 운전하는 기사에 최적화된 1인분 주문이 가능한 식당이 생겨났고, 운행 사이의 짧은 식사 시간 동안의 식사를 위해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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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식당이나 상인식당은 없는데 왜 유독 택시기사들을 위한 ‘기사식당’은 존재했을까요? 기사식당의 탄생에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택시기사라는 직업의 특성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농어촌 인구가 도시로 몰리며 도시는 빠르게 팽창했지만, 늘어난 도시민을 실어 나를 대중교통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메우며 택시도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당시 기록을 찾아보면 하루 500km 가까이 운행하는 기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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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절미는 언제부터 먹었을까요? 인절미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뜻밖에도 우리 역사의 여러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한양을 떠나 공주로 피란했습니다. 그 피란길에서 한 백성이 올린 이름 모를 떡.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만든 맛이 뛰어난 떡이라 하여 왕이 ‘임절미(任絶味)’라 불렀고, 훗날 ‘인절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공주 지역에 전해집니다. 또한 인절미는 여러 옛 기록에서도 만날 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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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미군 부대가 주둔한 의정부와 동두천, 송탄 등지에서는 부대 밖으로 흘러나온 햄과 소시지를 김치, 고춧가루와 함께 끓여 먹었습니다. 부대찌개는 그렇게 결핍의 시대를 견디던 사람들의 식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서양 식재료와 한국의 양념이 한 냄비 안에서 만난 이 음식은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고 섞이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낸 흔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대찌개는 단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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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음식인문학 #감칠맛 #국물문화 우리는 왜 라면에 열광할까요? 1963년 한국에 처음 등장한 라면은 지금처럼 맵고 얼큰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닭고기 국물의 담백한 맛에서 출발했지요. 그런데 6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라면은 놀랍도록 한국 음식이 되었습니다. 고추와 마늘, 파와 후추가 들어가 얼큰해졌고, 고기와 멸치, 다시마의 감칠맛은 한 봉지의 수프로 압축됐습니다. 뜨거운 국물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시원하다”고 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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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따라가면, 한국 사회가 보입니다. 1963년 한국에 들어온 라면은 전후 식량난과 밀가루 원조, 혼분식 장려의 흐름 속에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당시의 라면은 허기를 채우는 데 필요한 한 끼였습니다. 도시가 커지고 공장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하루도 빨라졌습니다. 오래 준비해 먹는 밥보다 몇 분이면 끓일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해졌고, 라면은 산업화 시대의 속도와 잘 맞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맛도 한국식으로 바뀌었습...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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